글로 신뢰를 얻었던 경험들
고등학교 1학년때 즈음이었나. 학교에서 이상한 과학책 독후감 대회를 열어서 전교생이 필수로 참여해야했던 적이 있었다. 그다지 책과 가깝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는 이렇게 강제적인 독후감 대회가 어디있냐면서 매일 툴툴댔던 기억이 있다. 나는 애초에 하기 싫은 것에 대해 "닥치고 그냥 해!"가 잘 안되는 사람이라, 다른 친구들보다 불만이 더 많았던 것 같다. 결국 나는 책을 단 한줄도 읽지 않고 인터넷에서 각종 자료를 수집하여 책을 '이해'한 다음 나만의 글로 바꿔서 마치 책을 읽은 것 마냥 독후감을 제출해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알고보니 그 대회는 전국 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대회였고, 나의 독후감은 전국 2등에 당선되었다. 덕분에 고급진 호텔에 가족들이 모두 초대되어 코스요리를 먹게 되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오- 인생 개꿀이군"하고 아무 생각없이 넘겼는데 돌이켜보니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내가 의외로 글쓰는 것을 좋아하고 나름대로 성과(?)도 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하고 은근히 나 스스로를 믿어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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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회사를 다니는데 회사가 이전에 했던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다니다간 회사도, 나도 더이상 발전이 없겠구나 싶어서 퇴사할 마음으로 글을 하나 적어서 대표님 메일로 보냈다. (엄청 큰 회사가 아니라 소규모 회사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글에는 내가 이 회사를 떠나려는 이유 7가지와 함께 각각의 내용들을 나름의 논리로 구구절절 풀어놓았다.
글을 읽은 대표님이 다음날 1대 1 면담을 하자고 하셨다. 네가 뭔데 가소롭게 이런 글을 쓰냐고 혼나는 건 아닐까 조마조마하며 잔뜩 쫄아서 면담에 들어갔는데, 대표님이 하시는 말씀은 솔직히 맞는말 투성이라서 할말이 없다는 것. 그리고는 솔직하게 이 글을 써줘서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해주셨다.
이후에 대표님은 내가 쓴 글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개선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셨지만, 나는 결국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비록 끝은 퇴사였지만, 마지막 퇴사날까지도 대표님은 나를 엄청나게 신뢰하고 인정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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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 나는 다시 한번 글의 힘을 느끼게 되었다.
아는 지인을 통해서 개발 의뢰 건을 받게 되었는데, 문서를 검토해보니 내가 사용하는 주 언어도 지원하지 않아서 다른 언어에 빠르게 적응해야했고, 개발 환경도 영 나에게 익숙한 상황이 아니라서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결국은 의뢰를 거절하는 답을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 내가 문서 검토하면서 소비한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노션 페이지 하나에 개발 요청을 주신 건에 대한 답변과 함께 해당 개발을 위해 필요한 것, 원래 진행하려건 개발 계획(프로세스), 그리고 내가 우려되는 점, 결론 등을 자세히 적고 참고했던 문서 링크도 달아서 한페에지 짜리 문서로 답변을 드렸다. 이 문서를 기반으로 이후에 다른 개발자에게 의뢰하면 그 분이 좀 더 이해하기 편할 것이라는 첨언과 함께.
비록 거절의사를 밝히는 답변이지만, 이렇게 상세하게 문서를 작성해서 거절했던 개발자는 경험해본 적 없으셨던지, 의뢰자분이 상당히 감동을 받으신 것 같았다. 그리고는 여유기간을 대폭 늘려서라도 작업을 진행해주실 수 있겠냐는 답변을 들었다. 의뢰자 분의 말로부터 내가 이분에게 엄청난 감동을 주고 신뢰를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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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가 나보다 글을 잘 쓰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진심이 담긴 글쓰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어쩌면 그 글에는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민의 흔적들이 투박하게 묻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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