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의 이유>

김영하

내가 여행하는 이유

8월 초, 회사 공식 휴가 일정이 잡혔길래 시원하게 일주일을 쉬어버렸다. 그리고 이제는 각 여행마다 한 권의 책을 끝내보려고 하는데, 이번 책은 바로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였다.

가장 좋았던 챕터는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였다. 내용 중에서 김영하 작가가 여행을 계속 하는 이유 중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느낌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간 내가 가져왔던 생각과 꽤나 비슷해서 나도 몰랐던 내가 여행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책 내용에 따르면 주인공도 모르는 어떠한 습관이나 생각, 관념 같은 것을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그러나 곧 또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나는 여행을 할 때, 낯선 환경에 던져져 내 정신이 선명해지는 그 느낌을 좋아한다. 이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기 위해 나는 선명한 정신력과 엄청난 활동력을 내 안에서 이끌어 낸다. 평소 정말 말도 못하게 게으른 편이라, 이렇게 낯선 환경에 놓여 부지런해지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 낯선 카페에 가서 일을 하거나 책을 읽고, 낯선 거리를 걸으며,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낯선 숙소에서 잠드는 그런 생활을 좋아한다. 그것이 낯선 환경에 놓였을 때, 선명해지는 그 정신력, 그것이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가 아닐까.

또 하나 재미있었던 챕터는 “노바디의 여행”이었다. 해당 챕터의 내용 중,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 에서 오디세우스와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가 싸우는 이야기를 다루었는데, 누군가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으로 가고자 여행을 떠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사회내에서 존재하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해주고 알아봐주었을 때, 비로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짧은 챕터 내에서 잘 표현해냈다.

그밖에 남기고 싶은 문장들은 아래와 같이 남겨두었다.

남기고 싶은 문장

  • 작가의 여행에 치밀한 계획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너무 순조로우면 나중에 쓸 게 없기 때문이다.

  • 내 안의 프로그램은 어서 이 편안한 집을 떠나 그 고생을 다시 겪으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디로든 떠나게 되고, 그 여정에서 내가 최초로 맛보게 되는 달콤한 순간은 바로 예약된 호텔의 문을 들어설 때이다. … ‘나는 다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제 한동안은 안전하다.’ 평생토록 나는 이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낯선 곳에 도착한다. 두렵다. 그런데 받아들여진다. 다행이다. 크게 안도한다. 그러나 곧 또다른 어딘가로 떠난다.

  •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 그런데 아니었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이 가깝다. 우선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처음 방문하는 그 낳선 세계에서 나는 허용된 시간만큼만 머물 수 있다. 그들이 ‘때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는 떠나야 한다. 더 머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낯선 인물들로 가득한 세계를 찾아 방랑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자 마음이 참 편해졌다.

  •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대,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 여행은 그런 우리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부터 끌어내 현재로 데려다놓는다. 여행이 끝나면, 우리는 그 경험들 중에서 의미있는 것들을 생각으로 바꿔 저장한다.

  •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바야르는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유쾌한 책에서 이런 여행을 비여행 혹은 탈여행이라 불렀다.

    • 단 한 번도 자신이 사는 쾨니히스베르크를 벗어나지 않았으면서도 지리학 강의를 열었던 이마누엘 칸트

    • 하인을 시켜 여행지를 둘러보게 하고 본인은 선실에 머물렀던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

  • 하지만 이런 비여행보다 <알쓸신잡>에 가까운 것인 이른바 탈여행이다. 탈여행은 믿을 만한 정보원을 시켜 여행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 여행의 경험은 켜켜이 쌓여 일종의 숙성과정을 거치며 발효한다. 한 층에 간접경험을 쌓고 그 위에 직저 경험을 얹고 그 위에 다시 다른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추가한다. 내가 직접 경험한 여행에 비여행, 탈여행이 모두 더해져 비로소 하나의 여행 경험이 완성되는 것이다.

  • 인류는 오래전부터 인생이 여행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오고, 여러 가지 일을 겪고, 결국은 떠난다.

  • 인간이 타인의 환대 없이 지구라는 행성을 여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낯선 곳에 도착한 여행자도 현지인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철학자 알폰소 링기스는 여행에서 우리가 낯선 이에게 품는 신뢰, 그것의 기묘함에 대해 썼다. 일단 누군가를 신뢰하기로 마음먹으면 우리의 정신 속으로 평안함 뿐 아니라 자극과 흥분이 파고들어온다. 신뢰란 다른 생명체와 맺어지는 관계 가운데 가장 큰 기쁨을 준다.

  • 자기 의지를 가지고 낯선 곳에 도착해 몸의 온갖 감각을 열어 그것을 느끼는 경험. 한 번이라도 그것을 경험한 이들에게는 일상이 아닌 여행이 인생의 원점이 된다. 일상으로 돌아올 때가 아니라 여행을 시작할 때 마음이 더 편해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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